마틴 & 헨리 보엠: 연합감리교회의 창립을 도운 가족

마틴 보엠(왼쪽)은 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의 공동설립자였다. 그의 아들 헨리(오른쪽)는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함께 여행했던 감리교 목사였다.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마틴 보엠(왼쪽)은 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의 공동설립자였다. 그의 아들 헨리(오른쪽)는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함께 여행했던 감리교 목사였다.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연합감리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가족을 꼽으라면 아마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활동했던 한 아버지와 아들 또한 우리 교회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버지였던 마틴 보엠은 연합감리교회로 통합되었던 교단 중 하나였던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의 공동창립자였다. 그의 막내아들이었던 헨리 보엠은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과 5년간 함께 여행했던 미(북)감리회의 목사였다.  

아래 열 가지 사실을 통해 이들 두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삶과 사역을 간단히 알리고 약 200년 뒤 연합감리교회의 일부가 되었던 두 역사적 교회 운동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1. 마틴 보엠은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725년 11월 30일 마틴 보엠은 제이콥 보엠과 바바라 보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위스에서 이주해 왔고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 근처에서 결혼했다. 마틴은 그의 아버지가 평신도 장로로 섬겼던 지역의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자랐다. 가족의 모국어는 독일어였다. 

보엠 가문이 기부한 땅에 이 지역의 첫 감리교회였던 보엠기념교회가 지어졌다. 사진 제공: 위키미디어 커먼즈, 공개 도메인.

2. 마틴="" 보엠은="" 성공적인="" 농부였다.

제이콥 보엠은 자신의 농장을 구매하기 전까지 대장장이로 일했다. 마틴 보엠이 성장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181에이커의 땅을 주었다. 마틴은 40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계속해서 토지를 구매했던 성공적 농부였다. 

1753년 마틴은 메노나이트 교우였던 이브와 결혼했고, 슬하에 8명의 자녀를 두었다. 막내였던 헨리는 1775년 6월 8일에 태어났다. 

3. 마틴 보엠은 우연히 목사로 피택되었다. 

30대 초반이었던 마틴 보엠은 다소 놀라운 방식으로 지역 교회의 목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관례는 교인들에 의해 목회자 후보로 추천을 받은 이들이 앞으로 나와 성경을 선택해 제비를 뽑는 방식이었다. 보엠이 선택한 성경에는 목사 피택을 뜻하는 잠언 16:33이 쓰여 있는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그는 새로운 목회자가 되었다. 

4. 마틴 보엠은 확증을 받은 심오한 경험을 했다. 

목회자의 역할은 젊은 농부에게는 벅찬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완전히 부적절한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 이러한 고민은 믿음의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깨달았다.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은혜를 구하면서, 정작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밭을 가는 중에 마틴 보엠은 길을 잃은 듯 느꼈고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는 밭의 한 줄이 끝날 때마다 기도했다. “어느 순간에,” 그는 말했다. “기쁨의 물줄기가 내게 쏟아졌다.” 그 주 일요일, 보엠은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나눴다. 

5. 마틴 보엠은 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확증을 받은 보엠의 이야기는 너무나 강력하여 다른 교회에서 그를 초청해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할 정도였다. 이내 보엠은 랭카스터 카운티와 더 먼 곳을 여행하며 그가 가는 곳마다 설교했고, 그가 인도하는 집회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보엠 부흥회”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1761년 그의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담임 목사가 작고하자 마틴 보엠은 감독이 된다. 

6. 마틴 보엠은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를 공동 창립했다. 

보엠이 아이작 롱의 창고에서 열린 메노나이트 모임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독일 개혁파 목사였던 필립 윌리엄 오터바인도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설교가 끝난 뒤 오터바인은 자신을 보엠에게 소개했고, 긴밀한 업무 관계가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 보엠과 오터바인은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를 함께 창립하고 이 교단의 첫 번째 감독들로 섬기게 된다. 

Henry Boehm (left) was photographed at 100 years old with Thomas Carlton, director of the Methodist Publishing House. Photo courtesy United Methodist Archives and History.

100세의 헨리 보엠(왼쪽)이 감리교 출판부의 이사 토마스 칼튼과 찍은 사진, 사진 제공: 교회역사보존위원회

7. 마틴 보엠은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투표를 통해 축출되었다. 

오터바인과의 협력과 보엠의 열정 및 메노나이트 공동체 바깥에서도 설교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메노나이트 동료들 사이에 우려를 낳았다. 그들은 보엠에 관한 일련의 혐의를 제기했고 그가 변화를 거부하자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했다. 

그런데도 보엠의 사역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이후 몇 년간 마틴 보엠이 자유로이 여행하며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들 제이콥이 가족 농장을 물려받았다. 

그가 해임된 지 240여 년이 지난 후, 메노나이트 교회는 보엠의 자격을 회복시켰고 그가 교단을 떠나도록 했던 일련의 결정을 번복했다. 

8. 보엠 기념 교회는 마틴 보엠의 땅에 세워졌다.

1775년경 감리교회의 속회 하나가 보엠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마틴의 아내였던 이브는 이 속회의 첫 번째 회원이었다. 이들은 이후 보엠 가가 기증했던 1에이커의 땅에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 카운티의 첫 번째 감리교회인 보엠 기념 교회를 세운다. 

말년에 마틴 보엠은 미(북)감리회에 가입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연합형제교회의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 

오늘날 보엠 기념 교회는 펜실베이니아주 윌로우 스트릿의 보엠스연합감리교회의 일부로 남아있다. 

9. 헨리 보엠은 미(북)감리회의 순회 설교자였다. 

마틴 보엠의 막내아들이었던 헨리는 보엠의 집에서 감리교 속회 모임이 시작되었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25세에 그는 메릴랜드, 버지니아 등지에서 미(북)감리회를 위해 설교하기 시작했고 이후 펜실베이니아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10. 헨리 보엠은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함께 여행했다. 

1808년부터 1813년까지 헨리 보엠은 미(북)감리회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의 여행 동반자로 섬겼다. 두 사람은 5년 동안 말을 타고 25,000마일을 함께 여행한 것으로 추산된다. 보엠은 그들의 여정을 기록하면서 애즈베리 감독의 회계, 신뢰할 수 있는 친구, 독일어 통·번역가로 섬겼다. 그는 애즈배리 감독의 요청으로 장정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866년 91세였던 헨리 보엠은 “64년 사역의 회고록(“Reminiscences, Historical and Biographical, of Sixty-Four Years in the Ministry)”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은 그의 아버지의 생애와 사역을 비롯해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와 통찰을 담고 있다. 

헨리 보엠은 1875년 12월 28일 10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이 이야기의 영문 기사는 2018년 6월 1일 처음 게시되었습니다. 

* 이오비노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교인 자료 담당 부서의 책임자입니다. 이메일을 보내 연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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